서계의 생애와 학문

여기 시대를 초월해 살았던 한 지성이 있으니, 서계 박세당이 바로 그 사람이다.

‘기환자제(綺煥子弟, 비단옷을 입고 사는 귀족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문과에도 장원한 서계는 한때 관료로서 탄탄대로를 달리며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지만 타협과 쟁론을 일삼는 사환(仕宦, 벼슬살이를 함)을 천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학자로 돌아오기까지 10년의 피끓는 풍상이 뒤따랐고,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의 영욕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었다.
이 때 서계가 찾은 곳이 수락산 석천동이었다.

아버지 금주군(錦洲君)의 유업이요, 먼저 간 아내 의령남씨의 유혼이 깃든 석천동은 풍광도 빼어났지만 서계에게는 더할 데 없이 아늑한 정신적 고향이었다. 낮에는 제야 경제가들과 접촉하며 땀을 들이며 채전을 일구었고, 밤이면 삼간 초옥에서 학문에 열중하며 학인으로서의 냉철함을 가다듬었다. 질린 현장학습의 경험을 담은 색경은 농부들과 고관을 같이하며 계획한 애민사상의 구체적 실천이었고, 사변록은 기존 학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주자학을 신봉하던 당시의 사상계는 서계에 대한 비판과 사변론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다. 이에 서계에게는 사문난적이란 올가미가 씌어졌고, 옥에 갇힌 끝로 모든 문적도 번번이 적폐로 내몰렸다. 그러나 서계는 서울을 오르내리며 대전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학문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손수 지은 묘표에다 “어떤 시련에도 세상에 고개를 숙이거나 소침해 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썼다.
그랬다. 서계의 학문은 문약(文弱)의 시대가 낳은 학술의 유희가 아니라 대장부적인 기상에 바탕한 한 지성의 소신이었던 것이다. 비록 서계의 학문은 그 당대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지성과 실천에 바탕한 애민사상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채 오늘날 정신사상으로서 큰 맥힘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제 서계의 학문은 주자학의 울타리가 아닌 현대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고, 특히 2003년 여름에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학술행사와 현양사업이 이루어짐으로써 서계의 참모습이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계문화재단에서는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다양한 문화, 학술행사를 통해 선생의 정신세계가 바르게 이어지는데 앞장서고, 그러한 활동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교훈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가고자 한다.

Mission

Lorem ipsum dolor sit amet, consectetur adipiscing elit. Ut elit tellus, luctus nec ullamcorper mattis, pulvinar dapibus leo.

Vision

Lorem ipsum dolor sit amet, consectetur adipiscing elit. Ut elit tellus, luctus nec ullamcorper mattis, pulvinar dapibus leo.

Values